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만큼 어떠한 상황이나 일 등을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대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옛말. 애초에 콩 심고 싶은데 팥 심어야 하고, 팥 심고 싶은데 콩 심어야만 하는 상황을 경험하곤 한다.

물론, 가뭄에 콩 나듯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의사 결정의, 행동의, 실행의 완전한 주체로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통제 가능한 상황' 때문에 어떤 이는 편한 패키지 여행 놔두고 굳이 힘든 자유 여행을 가고, 어떤 이는 돈 몇 푼이면 쉽게 살 수 있는 옷, 소품, 가구 등을 스스로 만든다. 조금 더 돌아 가더라도, 좀 더 어렵더라도, 내 뜻대로 부딪히고, 경험하고, 행하겠다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기 결정권, 통제권에 대한 욕구가 다른 것은 아니다. 요즘 10대, 20대의 젊은 층들은 학업, 취업, 사회생활 스트레스를 이른바 '탕진잼'으로 푼다. 1판에 500원, 1,000원하는 인형뽑기 앞에서 많게는 몇만원까지 투자하여 사실상 자신에게 필요 없는 인형을 뽑는다거나, 다이소에 가서 1,000원, 2,000원 짜리 저렴한 생필품들을 장바구니 한가득 쓸어 모으는 소소한 탕진을 하는 것인데, 통제 가능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에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아주 소박한 것일지라도 통제 가능한 상황 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만족은 크다면 컸지 결코 작지 않다. 타인이 보면 별 쓸 데 없고, 효율성 낮고, 이해 불가능한 일들이 본인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 값진 일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하고싶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지극히 사사로운 프로젝트라든가 도박, 중독 등 극단적인 경우 등 외부로부터의 통제가 꼭 필요한 상황이 있다. 하지만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온전히 자기 계발을 위한, 자기 만족을 위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라면 통제받을 이유가 없다.


지난번 알쓸신잡에서도 통제 가능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정재승 교수가 '다른 곳보다 카페에서 일이 더 잘되는 이유'에 대해 '커피하우스 이펙트' 이론을 통해 설명해준 것인데, 공간을 본인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 몰입을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꽤 일리 있는 주장 같았다. 실제로 카페에는 '왜 취업 안하냐'고 잔소리하거나 걱정하시는 부모님도 없고, 나보다 잘 나가서 부러운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도서관이나 독서실처럼 조용히 하라고 포스트잇 붙이거나 면박주는 사람도 없다. (너무 장시간 앉아 있어서 카페 주인 속 끓이는 경우는 논외로 하자.)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공부도 하다가 화장실도 갔다가 커피도 마셨다가 친구를 만나 대화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고, 의욕(motivation)을 잃거나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뻔히 눈에 보이는 벽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벽', '보이지 않았던 벽'들에 부딪힌다는 것은 생각보다 아픈 일이다. 이런 충돌이 쌓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 자신의 능력을 어떤 정도까지만으로 제약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도 있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는 것이다. 우울하다.


어떻게 보면, 통제 가능한 상황을 경험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마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이 취업 난에, 저소득 고물가 시대에, 굳이 별 쓸데도 없어 보이는 혼자만의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시길 바란다. 자신을 둘러싼 제약이 많은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통제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자기 안의 에너지와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일 지 모르니까. 사실 혼자서 무엇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를 마주하든 간에 오롯이 혼자 끝까지 부딪혀볼 수 있는 권리, 필요 이상의 통제를 받지 않을 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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